매경이코노미 편집장의 2282호 글이다. 참고로 이런 주간지나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 DBR(동아비즈니스리뷰) 같은 월간지는 정제된 좋은 글들이 담겨 있다.
물은 많지만 마실 물은 희소한 클릭베이트(clickbait, 낚시 기사) 홍수시대에 시원함과 청량감을 동시에 주는 탄산수 같아 즐겨읽고 있다.
삼성전자와 대기업병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삼성전자 조직문화를 꼬집으며 언급한 단어는 ‘대기업병’이다.
대기업병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조직이 비대해진 이후 혁신성과 효율성 추락, 과거의 성공 사례만 고집하는 문화, 사라진 부서 간 소통, 조직 이기주의, 사내 정치 등이 대표적인 징후다.
전례만 좇는 것은 전형적인 대기업병의 단면이다. 최근 삼성전자 직원을 두고 ‘삼무원(삼성전자+공무원)’이라는 조롱 섞인 단어가 등장했다. 삼성전자의 보신주의를 꼬집은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아래 인터뷰이들이 말한 이런 일을 자주 보게 된다. C레벨 임원까지 제대로 된 현장의 상황이 공유되지 않는 정보의 병목현상(Bottleneck)은 물론 거꾸로 C레벨에서 탑다운으로 내려온 지시도 현장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C레벨에서 전무, 상무, 부장, 차장 등 지시가 내려오면서 개인과 부서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는 척, 시늉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관계가 뭉친 사람들끼리 자기들만의 패밀리, 카르텔 모임을 형성해 형님, 아우 하며 서로 지켜주고 끌어준다. 가끔 우리와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 생존을 위해 즉결 처형이다.(물론 모든 대기업 조직이 다 그런 건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조직은 규모에 상관없이 인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A급 인재 확보에 강박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는 故 스티브 잡스는 인터뷰 중에 유명한 말을 했다.
“A급 직원들로 팀을 구성하려면 무자비해야 합니다. 팀이 성장함에 따라 몇 명의 B급 직원을 찾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B급 직원은 C급 직원을 뽑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직원들을 불러 모아 그 속에서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A급 직원은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나 A급 인재만 뽑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협력하며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정말 일 잘하는 최고의 사람들은 스스로 관리합니다.” -故 스티브 잡스
잡스는 채용에서 높은 기준을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A급 직원은 다른 A급 직원과만 일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만약 회사에서 B급 직원을 허용하면 이러한 역학 관계가 깨져 A급 직원이 조성하는 높은 성과 문화가 손상돼 우수성의 기준이 희석된다고 본 거다.
그래서일까. 실리콘밸리나 성장하는 회사의 HR 담당자는 최고로 똑똑하고 일 잘하는 A급 사람들로만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에서 HR은 매년 1~2번씩 있는 조직개편 때만 주목받지 전통적인 재무나 전략에 비해 그 위상과 조직 내 영향력이 생각보다 높지 않은 듯 보인다.
Anyway, 삼성도 롯데도, 다른 회사들도 대기업병을 극복해 한국경제에 기여해 주길 소망한다.
한국경제 이대로 대기업병에 발목?
“신세계는 명품, 현대는 판교는 F&B, 더현대는 젊은 브랜드로 완전 성공했잖아요. 롯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세계처럼 명품으로 가려 했지만 이미 신세계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쉽지 않고 더현대처럼 젊은 브랜드로 가려니 기존 점포를 이렇게 바꾸려면 오랜 기간 매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걸 용인할 점장이 없는 거죠.
롯데 강남점을 명품 중심으로 바꾼다 해놓고 흐지부지하다 완전 폐기한 데는 이런 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2022년 롯데호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호텔업계 미슐랭 가이드) 5성 호텔로 3년 연속 선정됐는데 이 내용이 한동안 회장에게 보고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라호텔은 계속 5성 호텔에 꼽히고 있는데 시그니엘은 5성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시그니엘 뭐하고 있냐 불호령이 내려올까 걱정해 아무도 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알음알음 흘러나왔습니다.
당시 상트 호텔 직원들이 ‘열심히 해서 엄청난 성과를 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하곤 했습니다.”
“쿠팡의 성공 비결로 막대한 물류 투자를 꼽는 이가 많지만 전문가들은 쿠팡 김범석 회장이 데려온 10여명의 인도계 천재 개발자를 얘기합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쿠팡 알고리즘은 정말 따라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이에요.
국내 업체들도 인도계 개발자를 데려오면 되지 않냐고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저 데려오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그들이 회사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대기업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에요. 그들이 맘껏 일할 수 있게 가만두겠어요? 그러니 아무도 그런 시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죠.”
“2020년 12월 AI연구원을 출범시켰는데 계열사에 AI 도입하자 해도 콧방귀도 안 뀌는 CEO가 수두룩했고 지금도 비슷합니다. 그거 쬐끔 성과 내려고 당장 굴러가고 있는 바퀴를 멈출 수 없다는 거죠.
AI연구원 관계자들이 열 받아서 그냥 글로벌에서 먼저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계열사 들어가자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니까요.”
“JY 시대 들어와서 용인이 재무 쪽에 치우쳤는데 그때부터 삼성이 큰일 났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최지성 전 부회장에 이어 정현호 부회장으로 내려오면서 ‘수익성과 원가 절감’에만 포커스가 맞춰졌죠.
삼성전자만이 아니에요. 삼성SDI는 갤럭시 휴대폰 배터리가 불난 이후로 ‘사고만 치지 말라’는 분위기가 강해 정말 한 5년간 몸만 사리고 있었어요. 한때 씨티증권의 ‘SDI 목표주가 50% 인하’ 같은 보고서가 나온 게 다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죠.”
삼성전자가 5만전자 나락으로 굴러가면서 ‘삼성전자가 대기업병에 단단히 걸렸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만일까요. 대기업병에 빠지지 않은 기업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스타트업 정신으로 똘똘 무장해 대기업 반열에 우뚝 올라선 네이버, 카카오도 이제 대기업병으로 몸부림치긴 마찬가지고요. 한국 경제는 이대로 대기업병에 발목이 잡혀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