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지주 이사회에서 그룹 대표님이 발표하실 예정입니다. 그룹 회장님과 이사회 임원들에게 2년간 진행한 프로젝트 타당성과 효과성을 입증해야 하는 중요한 발표 자리인데요. 프로젝트 홍보영상을 제작해 보여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와서요. 그런데 예산이 없어서…”
프로젝트 홍보영상 예산이 없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작은 프로젝트도 제대로 된 홍보영상을 위해 보통 수백~수천만 원을 사용한다. 하물며 2년간 300억이 투입된 대규모 프로젝트 성과 발표를 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예산이 없다니. 기간은 한 달도 안 남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참고로 내가 작년부터 회사에서 맡은 주된 역할은 내부 마케터와 개발자들을 교육, 자문하는 SEO(Search engine optimization, 검색 엔진 최적화)담당이다. 금융지주 겸직 소속이라 은행뿐 아니라 계열사들까지 도움드려야 한다. SEO 교육만으로도 빠듯한 상황.
참고로 SEO는 단순 상위 노출 스킬이 아니다. 금융업 회사만 하더라도 JP모건이나 모건 스탠리, HSBC 같은 글로벌 그룹에서 전무급 부대표(Vice President), 부장(Director)까지 있다. 그만큼 본부 조직 단위로 운영해야 하는 큰 업무다. 내가 회사에서 하는 SEO 업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회사에서 무슨 일하세요?
당연히 처음엔 거절했다. 영상 기획-제작까지 하기엔 버거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간 프로젝트를 이끈 그룹 대표님 말씀. 그 마음 이해돼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홍보영상 콘텐츠 제작에 대한 모든 전권(全權)을 주셔야 합니다.”
홍보영상 제작 시 3가지 문제
전권을 달라고 말한 이유는 기업 영상 제작에 있어 흔히 보이는 3가지 문제를 최대한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째, 난도질 같은 수정 문제.
기업에서 홍보영상을 포함한 콘텐츠 제작 외주를 맡기는 프로세스를 살펴보자. 먼저 대략적인 주제와 내용을 업체에 공유한다. 업체가 시나리오와 구성안을 기획해 온다. 수정한다. 수정을 반영해 영상이 제작된다. 다시 수정한다. 수차례.
타당한 이유로 수정이 진행된다면 좋다.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내용과 다르게 수정이 난도질 수준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많은 경우 담당자가 위로 보고하면 할수록 사공과 시어머니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콘텐츠는 처음 기획가 달리 고객에게 도움 되지 않고 몇몇 임원들만 만족하는 ‘그저 그런’ 결과물로 전락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저 그런’ 이란 고객에게 임팩트를 끼치지 못하는 콘텐츠를 말한다.
둘째, 불투명한 정보 공유 문제.
보통 외주 제작사는 회사 업에 대한 특수성,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관련 업종 프로젝트를 해봤다 하더라도 현업 담당자만큼 이해도가 깊지 못하다.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영상을 통해 설명하고 싶은 내용을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하다.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 프로젝트에 대한 깊은 사전 이해가 필요한데 문제가 있다.
회사 담당자는 어디까지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금융업 같은 경우 내부통제, 준법, 정보 보안 이슈 등 여러 요소가 얽혀있다. 잘못 말했다가 내가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리스크를 피하고자 프로젝트 진행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업체에게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촉박한 시간 문제.
외주제작 의뢰는 기한을 넉넉히 주지 않고 급박하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제작사 입장에서 기획은 커녕 제작 준비할 시간도 충분치 않다. 때문에 규모가 큰 영상 프로젝트일 경우 제일기획 같은 기획 업체가 프로젝트를 턴키로 수주한다.
기획은 자신들이 하고 협업 프로덕션에 제작만 재하청을 주는 경우가 많다. 기획만 하는 회사라 같은 업종 타 회사를 벤치마킹해 비슷하게는 만든다. 재하청 업체를 푸시 하기에 납기일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돈이 많이 들어서 문제지만.
덧붙여 같은 직원끼리 외주 대행사 대하듯 모든 걸 다 떠넘기고 나 몰라라 하며 훈수만 두는 방식도 우려됐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제작하는데 감정 낭비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들을 뒤로하고 먼저 관련 부서 실무진들과 첫 미팅을 진행했다.
직원분들은 프로젝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현업에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들을 친절히 공유해 주셨다. 프로젝트 이름은 KB 미래컨택센터(FCC, Future Contact Center). 쉽게 말해 사람이 단순 상담을 하는 콜센터에서 AI 같은 기술을 접목해 화상상담을 포함한 미래상담센터를 추진하는 프로젝트이다. KB그룹 맏형인 은행에서 먼저 적용을 하고 이후 KB 그룹 계열사로 확장하기에 은행 콜센터를 배경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현업 얘기를 들으니 생각보다 훨씬 큰 프로젝트였다. 순간 생각했다.
‘대내외적으로 비용 절감이 이슈인 상황이다. 그룹 CEO와 이사회 임원들에게 그동안 했던 스토리텔링(우리가 잘했다는 자화자찬식의 내용)접근으로는 마음을 움직여 추가 예산 받기 힘들겠다. 받더라도 대폭 축소될 수 있다.’ 이후 말했다.
“사전에 공유드렸듯 기획부터 제작까지 프로젝트 홍보영상 제작에 대한 모든 전권을 주셔야 프로젝트를 맡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걱정 마세요. 어떤 업체보다 더 탁월한 결과물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일주일 뒤 후속 미팅 때 기획안을 공유드리겠습니다.”
직원분들 반응은 약간 의심 어린 눈초리. 하긴 이해도 된다. 처음 보는 직원이 저리 당당하게 말하니. 다행히 조건을 수락해 주셨다. 아마 예산도 없고 대안도 없으니 마지못해 수락하신듯하다. 하하.
다음은 내 차례다. 말을 했으니 책임져야지. 재빨리 사무실로 복귀해 최근 2년간 FCC와 관련된 사내 문서를 모두 출력해 학습했다. 문서를 읽다 보니 큰 흐름이 보였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강조할 방향과 장단점도 나타났다.
프로젝트 홍보영상 기획안
고민 끝에 기획안을 간략히 작성했다. 보통 내부 프로젝트 발표 자리는 “우리가 잘했다!”는 자화자찬식 내용이 많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신나겠지만 듣는 사람은 곤욕이다. 이번 프로젝트 홍보영상은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보수적인 금융권에서 회사가 아닌 고객 관점에서 어떤 도움을 주는 프로젝트인지, 실제 고객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해당 툴을 사용하는 현장 직원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장점만 아니라 단점까지 솔직히 담겠다는 이야기였으니.
사실 우리 다 경험상 알지 않는가. 현장 소리가 반영되지 않고 책상에서만 기획된 ‘광팔기’ 보여주기식 의미 없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실무자들은 현장 목소리를 담는 접근은 내가 관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크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함이 가진 힘은 훨씬 크다. 우리가 진행하는 서비스를 더욱 개선할 수 있는 소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직원과 고객 신뢰를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다. 이건 200억을 주고도 못 산다.
물론 솔직함은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과 결과물에 자신 없으면 추진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된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니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점까지 담자는 내용이 다소 파격적이었는지 현업에서는 조금 주춤 하셨다. 하지만 그래야 진정성을 담아 이사회를 납득시킬 수 있다고 설득해 진행했다.
프로젝트 홍보영상 현장 촬영
KB국민은행 콜센터 직원들은 서울 합정 사옥과 대전에서 근무한다. 결과물을 빨리 쳐내기 위해서는 가까운 서울에서만 촬영하고 끝내면 됐다. 하지만 이왕 맡은 프로젝트, 제대로 해야되지 않겠나. 유관부서와 협업해 새벽에 대전까지 출장 갔다. 출근하는 직원들, 업무 모습, 퇴근까지. 시간을 아껴 촘촘히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장의 ‘진짜’ 소리를 담아 영상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짜인 각본을 피해야 한다. 짜인 각본대로 촬영을 진행하면 편집과 제작 단계에서 편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경험상 안다. 짜인 대로 대본을 읽거나, 프롬프터를 보고 읽는 영상은 생동감과 역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반면 큰 틀만 잡고, 편한 분위기에서 대본 없는 인터뷰를 진행하면 촬영과 편집이 힘들어진다. 경험상 5배 정도 힘들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실제 고객도 출연했다. 직원과 고객 모두 대본 없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진행시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모두 중요하다. PD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말이 나올 수 있게 아이스브레이킹 등을 진행하며 유연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자연스러운 현장의 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 물론 몸은 살짝 더 고달팠지만. 결혼 후 찐 살 빼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프로젝트 홍보영상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도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프로젝트에 공감되고 몰입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자료 리서치를 하다 보니 얼마 전 콜센터를 배경으로 한 인디영화 다음 소희가 개봉된 사실을 알았다. 바쁜 가운데 해당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도입부에 넣으면 콜센터가 바뀐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요즘 재미 삼아 공부하고 있는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해 여성 캐릭터를 제작, 인트로에 넣고 음성을 합성했다. 이름은 ‘유리’로 했다. 내 아내 이름이다. 사랑꾼임을 증명했다.
영상만 잘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다. 마케팅 관점에서 엔드유저에게 도달하는 세심한 내용까지 신경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인물이 섬네일로 나와야 클릭률, 도달률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기에 이미지, 후킹 할 수 있는 메시지까지 신경 쓸게 많다. 물론 제작자가 아닌 기획자, 마케팅 부서가 맡을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다 해야 하는 상황. 섬네일까지 세심하게 작업해 사내 공유용으로 올렸다. 대고객용이라면 SEO까지 신경 써 키워드나 태그까지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내부용이라 이번엔 스킵했다. 결과는 대성공. 홍보영상은 호평을 받았고 FCC 프로젝트도 추가 예산을 성공적으로 배정 받았다.
생성형 AI로 만든 ‘유리’ ©KB
프로젝트 홍보영상 비하인드
참고로 나는 회사에서 종종 외주제작사가 제작한 콘텐츠를 검수하는 QC 역할도 도움 드린다. 전문 프로덕션 회사임에도 DI 작업을 모르거나, 촬영에서부터 세팅을 잘못해 이상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경우 업체에게 어떻게 촬영을 하고 후반작업을 해야 하는지 세세한 디테일을 말씀드린다. 그러면 업체분들은 상대적으로 긴장(?)해서 결과물에 조금 더 신경쓰는 일이 많다.
나는 촬영 시 상업 CF 광고나 영화의 룩앤필을 만들기 위해 디지털 색보정인 DI(Digital Intermediate) 작업을 한다. DI 작업을 위해서는 촬영 카메라 설정과 촬영 방법(적정 노출에서 2Stop 올리기 등)도 보통과는 달라 까다롭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DI 작업을 했다. 사운드도 더욱 또렷이 들리도록 잡음 제거와 보이스 톤 등 후반 작업을 수차례 진행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을 일반 분들은 모른다. 단순히 ‘멋있네’ ‘다르네’ 단어로 퉁쳐서 이해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1초만 봐도 안다.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지만 내 이름 걸고 제작하는 콘텐츠이기에 최고를 보여주고 싶었다.(학부 전공이 영화 연출이기도 하고 첫 직장이 지상파 mbc 공채 출신이라 프라이드도 있다)
보통 이 정도 퀄러티가 나오려면 외주 제작사에 8천~1억 원 정도의 금액을 사용한다. 회사의 비용 절감에 기여했다는 칭찬도 추후에 들었다.
보도자료용 사진도 전달했는데 서비스의 친근함을 잘 보여주는 웃는 사진이 잘 노출됐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현업 카운터 파트너 직원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업무상 여러 부서와 협업할 일이 많은데 손발이 잘 맞는 현업부서 직원들을 만나면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해서 좋다. 아! 하면 어!하고 알아듣는다고 할까.
아쉬운 점도 남는다. 처음 기획가 달리 원치 않는 수정을 몇 번 거쳤기 때문이다. 현장 콜센터 직원분들이 용기를 내어 현재 시스템이 개선됐으면 하는 마음에 좋은 피드백들을 말해주셨다. 하지만 처음 약속과는 달리 해당 내용이 포함되면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실무선에서 몇 번씩 말씀을 하셨다.
결국 해당 내용은 빼고 따로 콘텐츠를 만들어드리기로 절충했다. 대신 단점이 담긴 피드백 내용은 해당 부서 타운홀 미팅 때 대표님에게 꼭 공유해 주기로 약속해 주셨고 약속은 지켜졌다고 한다.
이 영상을 볼때마다 영업 현장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반영해 좋은 AI 서비스를 만드는 마중물로 기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정말 고도화된 서비스에는 현장 직원들 피드백이 반영됐을까. 고도화 프로젝트가 끝나면 확인해 봐야겠다.
직원들이 현재 구축된 시스템에 대한 아쉬운 점을 피드백하고 있다 ©KB